목록역사 (17)
알리의 블로그
2016년 서울지방직 7급 국사 기출문제 요약 1. 조선 후기 중인층과 서얼은 자신들의 기록물 이진흥 연조귀감 (향리의 역사와 인물 정리) 조희룡 호산외기, 풍요삼선(위항인들의 시집) 유재건 “이항견문록 (서얼의 역사) 2. 통일신라의 통치 체제 13개의 관부가 병렬적으로 독립 각 부의 장관은 여러 명인 경우가 많음 중앙과 지방에 각각 9서당과 10정을 두었으며 9서당은 군사력의 핵심 독서삼품과는 귀족들의 반발로 실패 3. 강화도 조약 이후 시찰단 파견 순서 김홍집 등의 2차 수신사(1880) 박정양 등의 조사 시찰단(1881. 4) 김윤식 등의 영선사(1881. 9) 민영익 등의 보빙사(1883) 4. 김부식 삼국사기 의 시대상황 신라 ․ 고구려 ․ 백제가 나라를 세우고 솥발처럼 대립하면서 예를 갖추어..
삼국시대 발해 고려 조선의 왕 순서 연대순(즉위시기) 정리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려 조선의 왕 이름과 즉위시기를 A4 용지 한장에 프린트 할 수 있도록 정리를 해보았습니다. 왕의 이름과 즉위시기만을 정리해 두어서 빠르게 왕을 찾아 볼수 있을 겁니다. pdf 파일로 되어 있고 인쇄해서 사용하면 좋습니다.
중방은 고려시대 국방 문제를 논의하던 무신들의 합의기구이다. 중방이 언제 설립되었는지 정화하지는 않지만 현종때 인 것으로 추정이 되고 있다. 이곳에는 2군6위의 지휘관인 16명의 상장군, 대장군이 모여 중대 사안을 결정했다. 회의를 주관하는 의장은 응양군의 상장군인 반주였다. 중방은 초기엔 기능이 약했으나 무신의 난 이후 그 위상이 격상되어 국가의 중대기구가 되었다.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으로 이어지는 초기 무신정권시대에 이들에겐 정치 경제 군사적인 기반이 없었는데 이를 뒷받침해주는 중방을 통한 정치가 이루어졌다. 최씨 정권시대에 이르러 최고집정부로서 교정도감, 인사기관으로서 정방, 사병적인 군사조직으로서 도방이 신설되었을 때는 중방의 필요성이 없어졌다. 이때 중방의 구성원인 상장군·대장군을 ..
고려의 음서제도 5품 이상의 귀족의 자제에게 주는 관직진출의 특권이었다. 이들은 과거시험에 응시하지 않고도 관료가 될 수 있었다. 이렇게 귀족들은 자시들의 신분을 세습하면서 특권을 누렸다. 음서제는 공음전의 영향으로 고려 사회는 폐쇄적인 귀족 사회가 되었다. 과거제는 시행되었지만 이런 신분적 특권이 중시되었다. 음서로 관직에 진출한 이들에겐 한품제의 제약이 없었고 대부분 고위관직으로 진출했다. 조선의 음서(문음)제도 고려시대에 비해서 그 특권이 대폭 줄어들었다. 조선에서는 2품 이상의 관료가 적용 대상이었다. 그리고 관직에 진출한다고 해도 고위관직으로 진출하기는 어려웠다. 16세기 이후엔 관직 진출 후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승진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더 이상 관직등용의 기회가 되지 못했다. 공음전..
이 사건의 발단은 경원 이씨 세력이었다. 이자연의 딸이 문종의 왕비가 되면서부터 이들은 강력한 외척세력이 되었고 이후 2번의 난으로 고려에 큰 혼란을 일으켰다 첫 번째는 12대 순종, 13대 선종, 14대 헌종의 짧은 왕위 교체의 혼란기에 이자의가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 난은 계림공이 진압을 했는데 그가 나중에 숙종이 된다. 두 번째 난은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겸이 자신의 딸이 예종의 왕비가 된 후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난을 일으킨 것이다. 예종은 여진정벌에 큰 공을 세운 윤관을 자신의 세력으로 만들어 왕권을 강화하려 했으나 반대 세력들은 그를 모함해서 파면시켰다. 그는 복직이 되고 나서 얼마 후 사망했고 이제 왕실은 이자겸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된다. 예종 사후 인종이 즉위하자 그는 왕의 측근 세력을 제..
신구 귀족의 대립( 서경파 세력, 개경파 세력의 갈등) 인종은 이자겸의 난 이후에 왕권 강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런 왕의 의중과는 달리 귀족들은 보수(김부식)와 개혁(정지상, 지역출신) 세력으로 나뉘어 격한 대립이 있었다. 서경 출신 세력은 서경길지설을 주장했으나 김부식 세력은 이에 반발했다 묘청등을 위시한 서경파는 도교, 풍수지리설을 따르고 자주적, 유교정치를 강조했다 이들은 귀족세력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개선하려 했고 서경천도론,칭제건원, 금국 정벌을 주장했다. 칭제건원(稱帝建元) 한자를 풀이하면 稱: 부를 칭, 帝: 황제 제, 建: 세울 건, 元: 연호 원 의 뜻이다. 즉 왕을 황제라 부르고 독자적으로 연호를 사용하자는 뜻이다. 그러나 김부식등 개경세력은 서경천도에 강력 반발했고 금과의 사대관..
묘청의 난 이후 문신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독점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무신에 대한 차별은 더욱 극에 달했다. 무신들은 생활고와 천대를 받으며 불만이 더욱 커져 갔다. 당시 왕인 의종은 왕이 측근세력과 함께 향락에 빠져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그러나 이를 참지 못한 무신들은 결국 난을 일으키게 된다. 정중부, 의방은 의종의 보현원 연회에서 문신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다. 이들은 의종을 거제도로 귀양 보내고 명종을 왕으로 삼았다.(1170) 이후 무신정권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전개된다. 그 처음은 정중부였다. 그는 이의방을 제거하고 중방을 중심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이때 명학소의 난이 일어난다. 다음은 경대승이 집권했다. 그는 정중부를 제거하고 사병집단인 도방을 중심으로 무력 통치를 했다. 전주 관노의..
충선왕은 권문세족을 견제하기 위해 정방을 폐지한다. 또 충렬왕때 설치된 문한서를 사림원으로 개칭한다. 권문사족을 견제하기 위해 개혁을 추진한다. 하지만 충선왕은 조비무고사건으로 퇴위 당한다. 이후 충렬왕이 다시 즉위한다. 사실 충령왕은 충선왕의 아버지다. 충선왕은 이후 원무종의 친분으로 다시 심양왕이 된다. 심양왕이란 원나라에서 고구려인에게 준 벼슬의 하나다 당시 중국의 심양지역에 고려인들이 많이 거주했는데 그 지역 책임자로 임명을 한 것이다. 충렬왕 사후 충선왕은 다시 왕위에 오르고 개혁을 시작한다. 의염창을 설치해 소금전매제를 하고 국가재정을 확보한다. 충선왕은 실제로 고려에 귀국하지 않고 전지(편지)를 통해 정치를 했기 때문에 그 개혁이 성공할 수 없었다. 충선왕이 왕에서 물러 나고 그 아들 충숙왕..
당나라가 고구려에 멸망했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고구려 유이민들은 여전히 당나라에 저항을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나라는 고구려의 유민들을 회유하기 위해 보장왕의 후손을 요동의 도독으로 임명했다. 7세기 후반 고구려의 장군이었던 대조영은 나라를 세운다. 위치는 만주 길림성 돈화시 동모산이었고 국호는 진, 연호는 천통이었다(698년) 대조영이 세운 나라가 처음부터 발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후 진은 국호를 발해로 바꾼다.(713) 발해에 대해 최초로 기록한 저서는? 이승휴의 저서 제왕운기 남북국 이란 용어를 최초로 나오는 책은? 발해고 (유득공 1784년) 참고 (김정호의 대동지지도에도 남북국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발해에 대한 기록한 역사서는? 이종휘 동사, 정약용 아방강역고, 한치윤 해동..
공민왕은 원나라로부터 철령위를 되찾아 온다. 그런데 원을 이어 건국한 명나라는 철령위를 자신의 영토라 주장하며 다시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한다. (우왕) 당시 고려는 명나라의 무리한 조공요구에 불만이 있었는데 조정에서는 명에 대한 입장의 차이가 있었다. 고려조정은 명의 요구에 반발해 요동을 정벌하기로 한다. 이성계는 4불가론을 들어 반대하나 왕과 최영의 강력한 주장에 밀려 요동 정벌을 시행하게 된다. 최영은 당시 이인임 일파를 몰아내고 고려 조정의 실권을 쥐고 있었다. 이인임은 우왕을 추대한 후 실권을 쥐고 전횡을 일삼았던 친원파 세력이었다. 그런데 위화도로 향하던 중 군사는 도망치고 도중에 비가 내려서 압록강을 건너기 어렵게 되는데 이때 이성계는 회군을 결심하고 다시 개경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최영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