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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의난 이 일어난 이유 본문

역사/한국사

묘청의난 이 일어난 이유

디디(didi) 2016. 3. 18.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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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 귀족의 대립( 서경파 세력, 개경파 세력의 갈등)
인종은 이자겸의 난 이후에 왕권 강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런 왕의 의중과는 달리 귀족들은 보수(김부식)와 개혁(정지상, 지역출신) 세력으로 나뉘어 격한 대립이 있었다.


서경 출신 세력은 서경길지설을 주장했으나 김부식 세력은 이에 반발했다


묘청등을 위시한 서경파는 도교, 풍수지리설을 따르고 자주적, 유교정치를 강조했다
이들은 귀족세력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개선하려 했고 서경천도론,칭제건원, 금국 정벌을 주장했다.


칭제건원(稱帝建元)
한자를 풀이하면 稱: 부를 칭, 帝: 황제 제, 建: 세울 건, 元: 연호 원 의 뜻이다.
즉 왕을 황제라 부르고 독자적으로 연호를 사용하자는 뜻이다.


그러나 김부식등 개경세력은 서경천도에 강력 반발했고 금과의 사대관계를 주장했다.


이 상황에서 인종은 서경 천도론에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반발한 김부식 세력은 묘청 세력의 숙청을 요구했다.


묘청은 무력으로 서경천도를 이루고자 난을 일으켰다.
국호는 대위국, 연호는 천개로 하고 군대 이름은 천견중의군이라 했다.
이때 1135년, 이 사건을 묘청의 난이라 한다.


그러나 이 난은 김부식 일파에 의해 1년 안에 진압된다.


결과로 보수 귀족세력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문신위주의 관료제가 더욱 강화되었고 차별을 심하게 받았던 무신들은 불만을 갖게 되었다.
이는 훗날 무신정변의 원인이 된다.


서경의 지위는 하락했고 분사제도는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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